센노 리큐가 와비차의 시조로 불리는 반면, 센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이 바로 바이사오(고유가이)입니다. 센차를 널리 알리는 동시에 당시의 문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남긴 바이사오의 삶을 살펴봅니다.
바이사오란
바이사오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고유가이(1675~1763)는 하스이케번(현재의 사가현)에서 번의의 아들로 태어나, 오바쿠종 류신지의 카린 화상 아래에서 승려 '겟카이 겐쇼'가 됩니다.
바이사오는 거의 50년에 걸쳐 수행에 힘썼지만 타락한 불교계에 실망해 승려의 길을 떠나 교토로 옮겨 갑니다. '찻집 통센테이'를 연 바이사오는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차를 파는, 오늘날로 치면 '이동 판매'와 같은 일도 했습니다.
그의 인품에 매료된 문화인들이 하나둘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 무렵부터 사람들은 애정을 담아 그를 '바이사오'라 부르게 됩니다. 이후 승려로서의 이름을 버리고 '고유가이'로 이름을 바꿔 차를 팔아 왔지만, 나이가 들며 체력의 쇠퇴를 느껴 결국 이 일을 접었고 89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일화로 만나는 바이사오
'고유가이'라는 이름의 유래
바이사오는 승려로서 '겟카이 겐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현재의 생활상을 묻는 말에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는데, 상대가 이를 "이처럼 우아하게 지내고 있습니다."로 잘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이를 흥미롭게 여긴 바이사오는 그 일본어 표현을 재치 있게 비틀어 '고유가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차의 매력을 알리는 일이 먼저
통센테이의 간판에는 "차값은 황금 백일에서 반문전까지, 주고 싶은 만큼 주시면 됩니다. 그냥 마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공짜보다 더 싸게는 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뜻은 "차값은 고반 2천 냥(현재 가치로 1억 엔 이상)부터 반문(지금 돈으로 약 30엔)까지, 얼마든 주고 싶은 만큼만 내면 됩니다. 무료로 마셔도 괜찮지만, 공짜보다 더 싸게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문구에서는 사람들이 차를 먼저 맛보고, 그 매력을 알아주길 바랐던 바이사오의 태도가 읽힙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센차'를 널리 알리다
바이사오는 권력과 결부되어 형식만 남아 버린 당시의 다도를 좋게 보지 않았고, 당나라의 육우와 루퉁이 말한 '청풍의 차'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불필요한 예법과 도구를 덜어 내고 담백하게 차를 즐기는 바이사오의 센차 스타일은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갔습니다.
당대 문화인들이 동경한 바이사오
에도가 일본의 중심이 된 시대였지만, 교토는 여전히 문화의 최전선을 달리는 대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바이사오는 문화인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바이사오의 깊은 교양,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방식, 재치 있는 말솜씨가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이토 자쿠추, 요사 부손, 와타나베 가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다노무라 치쿠덴처럼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찻도구를 스스로 태우다
바이사오는 노년에 들어 차를 파는 일을 접은 뒤, 소중히 아끼던 찻도구를 스스로 불태웁니다. 그것은 청빈한 길을 함께 걸어온 찻도구를 향한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사람도 없는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너희들(찻도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희를 쓸 수 없다. 내가 죽은 뒤 너희가 속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모욕을 당한다면, 너희는 나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서 화장해 주려 한다."라고 바이사오는 그 마음을 글로 남겨 두었습니다.
찻도구를 향한 깊은 애정이 전해지는 일화이지만, 그 찻도구가 불타 버린 탓에 '바이사오의 차 스타일'이 후세에 남지 못한 것은 큰 손실이기도 했습니다.
바이사오가 지향한 '차'
바이사오는 세속과 동떨어진 불교계를 떠나, 스스로 생계를 꾸리며 정신적인 높이를 추구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자립의 수단이 바로 '차를 파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식만 남아 버린 다도의 세계에 반발을 느낀 바이사오가 택한 차는 '말차'가 아니라 '센차'였습니다.
바이사오는 차를 파는 자리를 하나의 '살롱'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의 곁에는 서민부터 문화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차를 즐기는 동시에 서로를 북돋우는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름난 화가와 문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바이사오의 구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자잘한 일에서 벗어나 가까운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차를 즐기는 시간 속에서, 바이사오가 추구한 삶의 기쁨과 본질이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