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거리에 차 도구를 지고 걷는 노승이 있었어요. 두 개의 바구니를 메고—하나에는 다도구, 다른 하나에는 숯과 물을 담아—명소 고적에 자리를 잡으면 차 한 잔씩 우려내어 신분에 관계없이 대접했어요. 그 인물이 '바이사오(売茶翁)'라 불린 고유가이(高遊外)예요.
바이사오(1675~1763년)는 에도 시대 중기 사가 출신의 선승으로, 교토로 옮겨 센차를 팔기 시작했고 만년에 승적을 떠났어요. 그가 널리 퍼뜨린 건 센차라는 음료만이 아니에요. '신분에 관계없이 차를 통해 사람과 마주하는' 정신—그것이 바이사오의 유산이에요. 일본 차 산지가 키운 차를 서민의 손에 닿게 한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어요.
고유가이와 바이사오 — 두 이름이 말하는 것
바이사오의 승려 이름은 겟카이겐쇼(月海元昭)예요. 사가번 하스이케의 의사 가문에서 태어나 11세에 황벽종 선사 류진지의 카린도류(化霖道龍) 문하에 출가했어요. 1731년 57세에 류진지를 법제자 다이초(大潮)에게 맡기고 교토로 갔어요. 1735년 61세에 히가시야마에 츠센테이를 열고 차를 팔기 시작했어요. 만년에 승적을 떠나 고유가이(高遊外)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1763년 89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고유가이'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어요. 어느 날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질문받은 겟카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어요"라고 답했는데, 상대방은 그 말을 "고상하게 사신다"는 뜻으로 잘못 들었어요. 그 오해를 재미있게 여긴 겟카이가 이후 '고유가이'를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차를 팔며 사는 나날이 '고상함'으로 읽혔다—그 유머가 그의 인품을 잘 보여줘요.
'바이사오'라는 호칭은 서민과 문화인들이 친근하게 붙여준 것이에요. '차를 파는 노인'이라는 뜻으로, 점차 이 호칭이 본명을 넘어 정착했어요.
츠센테이와 교토 거리 — 센차 문화의 씨앗 뿌리기
교토로 이주한 바이사오는 히가시야마의 다옥 '츠센테이(通仙亭)'를 근거지로 삼아 휴대용 도구를 메고 명소 고적을 돌아다니며 각지에서 차를 우려냈어요.
츠센테이의 간판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어요. "차 값은 황금 백 일(黃金百鎰)부터 반 문까지, 주고 싶은 만큼 주세요. 그냥 마셔도 좋아요. 공짜보다 더 싸게 해 드릴 수는 없어요." 황금 백 일은 고반 금화 2천 냥에 해당한다고 전해져요. 돈이 있으면 내고, 없으면 안 내도 돼요. 신분이나 재력으로 찻자리를 구분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어요.
이 자세는 당시 '다도(茶の湯)' 문화에 대한 조용한 이의 제기이기도 했어요. 에도 시대 중기의 다도는 엄격한 예법과 권력자와의 결합이 강해져 서민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됐어요. 바이사오가 선택한 센차(말차가 아닌, 찻잎을 찻주전자로 우리는 차)는 그 격식 있는 세계에 대한 대항이기도 했어요. 센차라는 음료의 배경을 알면 바이사오의 선택의 의미가 더 깊이 보여요.
바이사오가 퍼뜨린 것: 센차도의 토대
바이사오가 교토에 미친 영향은 차의 보급만이 아니었어요. 그 주변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인과 지식인이 모였어요.
이토 자쿠추(1716〜1800년, 화가)와 요사 부손(1716〜1784년, 하이진·화가)은 바이사오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실제로 츠센테이를 방문했다고 전해져요. 와타나베 가잔, 라이 산요, 타노무라 치쿠덴 등은 바이사오 사후에 활약한 문인들이지만, 그가 퍼뜨린 센차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후 센차도의 융성을 뒷받침했어요. 이들이 공통적으로 끌렸던 것은 '신분을 묻지 않고, 차를 통해 사람과 마주한다'는 이념이었어요.
바이사오의 사상적 원천은 당나라의 다인 육우(陸羽)와 노동(盧仝)이었어요. '차는 예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격식이 아닌 마음의 자세를 묻는 차. 바이사오는 이 사상을 행동으로 체현했어요.
바이사오가 죽은 후, 그의 자세와 차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에 의해 '센차도'가 조직화·체계화됐어요. 바이사오 자신은 '도(道)'로서 제도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가 퍼뜨린 센차 문화는 에도 후기부터 메이지에 걸쳐 '센차도'로 꽃을 피웠어요. 에도 시대 차의 역사에서는 그 시대 차 문화 전체의 변화를 조망할 수 있어요.
만년에 다도구를 불태운 일
바이사오는 만년에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느끼고 차 판매를 그만둔 뒤, 자신의 다도구를 직접 불태웠어요.
자신이 죽은 후 다도구가 남의 손에 넘어가 사고팔리면 도구 자체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도구를 불태운 것은 도구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어요.
마치며
바이사오가 퍼뜨린 것은 '경계 없는 차'의 정신이에요. 신분에 관계없이 차를 통해 사람과 마주하는—이 자세는 우리 FETC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도 겹쳐요. 좋은 차는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어선 안 된다고요.
에도 시대 교토 거리에서 바이사오가 목표로 했던 곳—차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웃는 장소—은 오늘날도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센차 글에서는 바이사오가 선택한 차의 특징과 우려내는 법을 소개하고 있어요.
자주 묻는 질문
바이사오는 언제 태어났고 어떤 집안 출신인가요?
바이사오(1675~1763년)는 지금의 사가현에 해당하는 하스이케번의 의사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1763년 89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바이사오의 본명은 무엇인가요?
승려 이름은 겟카이겐쇼예요. 나중에 자신에 대해 한 말을 상대가 잘못 들은 것을 재미있게 여겨 '고유가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바이사오'는 '차를 파는 노인'을 뜻하는 친근한 별명으로 그대로 정착했어요.
바이사오는 왜 말차가 아닌 센차를 선택했나요?
바이사오는 말차를 사용하는 다도의 형식주의를 거부했어요. 에도 시대에 다도가 신분 위계와 정치 권력에 깊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에요. 센차는 찻잎과 더 단순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해 주었고, 그가 존경한 당나라의 차 문화에 더 가까웠어요.
바이사오가 세상을 떠난 뒤 다도구는 어떻게 됐나요?
바이사오는 만년에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고 차 판매를 그만둔 뒤 자신의 다도구를 불태웠어요. 죽은 뒤 도구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사고팔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도구 자체가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도구를 불태운 것은 그 도구를 아끼는 마음의 표현이었어요.
바이사오와 센차도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바이사오는 센차를 일부 상류층의 범위 밖으로 널리 퍼뜨린 실천자였고, 그 정신은 훗날 형태를 갖춘 센차도, 곧 센차의 길의 원천이 됐어요. 후대 인물들이 그가 전한 차의 정신을 이어받아 센차도의 이후 발전을 뒷받침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