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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우린 한 잔과 런던에서 우린 한 잔. 같은 찻잎, 같은 온도, 같은 시간. 그런데도 맛은 전혀 다릅니다. 빛깔도, 향도, 입안에 남는 여운까지도요. 원인은 찻잎도 도구도 아니라, 바로 물 자체에 있습니다.

일본의 물은 연수이고, 유럽과 미국의 많은 지역은 경수입니다. 이 차이가 차 맛을 놀랄 만큼 크게 바꿉니다. 특히 섬세한 일본차는 물의 영향을 받기 쉬운 차의 대표격입니다. 해외에서 일본차를 우리며 "어딘가 다르다"라고 느낀 적이 있다면, 어쩌면 수질의 차이를 이미 감지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연수와 경수의 차이

물의 "경도"란 물에 들어 있는 칼슘과 마그네슘의 양을 수치로 나타낸 것입니다. WHO(세계보건기구) 기준에서는 1리터당 경도가 120mg 이하인 물을 "연수", 120mg 이상인 물을 "경수"로 분류합니다.

일본의 수돗물은 대부분 지역에서 경도 50〜80mg/L입니다. 화산성 지질과 짧은 하천 덕분에 물이 많은 미네랄을 머금지 않은 채 수도꼭지까지 도달합니다. 병에 담긴 미네랄워터 역시 대부분 연수입니다. 일본에서 생활하면 경수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 유럽의 많은 지역과 미국 내륙부에서는 석회암 지층을 통과한 물이 공급되기 때문에 경도가 150〜300mg/L를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런던의 수돗물은 300mg/L를 넘기도 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일부 지역도 비슷합니다.

물이 차 맛을 바꾸는 이유

경수에 들어 있는 칼슘 이온은 차 성분과 직접 반응합니다. 특히 큰 영향을 받는 것이 카테킨입니다. 칼슘 이온이 카테킨이나 탄닌과 결합하면, 원래의 맛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연수(120mg/L 이하) 경수(120mg/L 이상)
차색 맑고 밝음 어둡고, 뿌옇게 흐려질 수 있음
카테킨 추출 충분히 추출됨 칼슘과의 결합으로 감소
테아닌 추출 충분히 추출됨 다소 감소
떫은맛 분명하게 느껴짐 억제되어 흐릿해짐
맑고 풍부함 약해지고 금속성으로 느껴질 때도 있음
어울리는 차 일본차, 섬세한 차 전반 풍미가 강한 홍차, 허브티

떫은맛이 줄어든다고 하면 좋은 일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떫은맛뿐 아니라 감칠맛과 단맛, 향까지 고르게 눌리게 됩니다. 전체 볼륨을 낮춘 듯한 상태라고 할까요. 차 본연의 섬세한 균형이 흐려지고 맙니다.

경수로 우린 차가 하얗게 흐려지는 일도 있는데, 이것 역시 미네랄과 폴리페놀의 결합으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몸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차의 즐거움 중 하나인 맑은 차색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차의 감칠맛을 이루는 핵심 성분인 테아닌도 카테킨만큼은 아니지만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교쿠로처럼 감칠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차는 작은 차이만으로도 인상이 크게 달라집니다.

즉, 연수는 차가 스스로 말하게 해주는 물입니다. 경수는 차의 목소리가 닿기 전에 먼저 편집해버리는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 종류별 추천 물

테아닌과 섬세한 향 성분에 기대는 차일수록 연수의 이점이 큽니다. 반대로 로스팅이나 발효로 힘 있는 풍미를 지닌 차는 경수에도 비교적 너그럽습니다.

차 종류 권장 경도 이유
교쿠로 50〜80 mg/L 감칠맛과 단맛이 핵심. 미네랄이 둘 다 억제함
센차 50〜100 mg/L 단맛과 떫은맛의 균형을 정확히 끌어내기 위해
말차 50〜80 mg/L 찻잎을 통째로 섭취하므로 미네랄 간섭이 더 크게 나타남
호지차 / 현미차 50〜120 mg/L 로스팅 향은 경수에도 비교적 강함
홍차 100〜200 mg/L 적당한 경수는 떫은맛을 누그러뜨려 한층 부드럽게 만듦
허브티 소재에 따라 대체로 경도의 영향을 덜 받음

교쿠로는 차광재배로 테아닌을 최대한 축적한 차입니다. 물의 경도에 가장 민감한 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센차 역시 섬세해서, 우리는 법에 신경 써도 물이 맞지 않으면 본래의 맛을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반면 호지차와 현미차는 로스팅과 블렌딩으로 풍미의 중심이 감칠맛에서 볶은 향으로 옮겨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수에서도 개성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차입니다.

홍차는 흥미로운 예외입니다. 어느 정도의 경도는 탄닌의 떫은맛을 부드럽게 만들어 오히려 둥근 맛을 내기도 합니다. 영국의 홍차 문화가 힘 있는 블렌드를 중심으로 발전한 배경에는, 경수라는 물 환경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용적인 조언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면 수돗물은 그대로 차에 써도 될 만큼 연수입니다. 염소 냄새가 신경 쓰인다면 정수기를 쓰거나 한 번 끓였다가 식혀 사용하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경수 지역에서 차를 우리려면

해외 주재 중이거나 여행지에서 일본차를 즐기고 싶을 때는 몇 가지 방법으로 맛을 꽤 가깝게 맞출 수 있습니다.

정수기는 염소 제거에는 효과적이지만, 일반적인 활성탄 필터만으로는 경도가 거의 낮아지지 않습니다. 경도를 낮추려면 이온교환수지나 역삼투압(RO) 방식 필터가 필요합니다.

병에 담긴 물을 고른다면 경도 100mg/L 이하 제품을 권합니다. 유럽에서는 Volvic(약 60mg/L)을 구하기 쉬워 일본차에도 잘 맞습니다.

여행지에서의 응급 대처

필터도 생수도 쓰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찻잎 양을 조금 줄이고, 추출 시간을 짧게 하고, 수온을 약간 낮추면 경수의 영향을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온도를 낮추면 카테킨 추출량이 줄고 칼슘과의 결합도 덜해지기 때문입니다.

콜드브루도 좋은 방법입니다. 찬물에서는 카테킨 추출이 천천히 진행되므로 경수의 영향이 작아집니다. 경수 지역에서도 콜드브루 센차는 놀랄 만큼 맛있게 우러날 때가 있습니다.

저희 FETC는 물이 차를 만들 때 가장 쉽게 지나치기 쉬운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찻잎도 중요하고, 온도도 중요하고, 도구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물은 그 모든 것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입니다. 물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정성껏 우려도 찻잎 본연의 맛은 충분히 닿지 않습니다. 먼저 연수를 준비해 보세요. 그다음은 차가 스스로 들려줄 것입니다.